꼭 미술관에 가지 않더라도 유럽 여행 중 우연히 들른 작은 카페에서, 벽면이 올리브그린 톤으로 이루어진 호텔에서,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색다른 감정을 느껴본 적이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내 주변을 둘러싼 장소나 소품들이 나도 모르게 내 정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인데요, 벽에 무심코 걸려있는 미술작품이나 공간을 이루는 색이 사람의 심리와 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특히 미술작품은 어른보다도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아이들의 미술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술을 삶의 필수 요소로 여기며 생활합니다. 이번 미술이야기에서는 아이들의 미술교육을 중요시하는 영국의 분위기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미술과 함께하는 일상, 영국
영국인들의 전통적인 식사습관에는 오후에 그릇, 꽃, 차, 음악을 함께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감성적인 문화를 가진 영국인들은 문화예술 전반의 영역에 걸쳐 관심이 많으며, 어느 가정집을 가 보아도 그림이 꼭 한 점씩 벽의 한자리를 차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런던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Tate Modern)이나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을 가보아도 3-6세의 아동들이 거장의 작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거장의 작품을 어릴 때부터 접할 수 있는 환경, 아이들과 함께하는 미술 프로그램이 많이 운영되는 현실, 그리고 이에 열정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영국 엄마들의 모습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필자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영국 엄마들은 자녀들이 영유아기일 때부터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하며 아이가 미술과 접할 수 있도록 애쓰는데, 왜 영국 엄마들은 이렇게 미술에 열광하는 걸까요?
10년간 필자가 영국을 드나들며 한가지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영국인들은 대체로 예민한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이 손에 꼽히는 영국의 날씨,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영국인들은 주변 국가에게도 다소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며 외골수인 민족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이런 환경 탓에 영국 엄마들은 아이들의 정서발달이나 자존감, 성격 형성에 유난히 신경을 씁니다. 그리고 미술이 정서 안정에 도움을 줄 것이라 믿고 아이들이 미술을 가까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미술심리치료’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아트테라피(Art Therapy)’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만 년 전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새겨진 들소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림은 문자를 사용하기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미술을 통해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감정적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방법인 아트테라피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것은 50여 년 전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트테라피가 알려진 시기가 1990년대인 것과 비교해보면, 서양에서 미술을 정서 안정의 조력자로 여긴 역사는 30년 이상 앞섭니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일상 속에서 미술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돕는 방법이 다양하게 활용됩니다.
한 예로, 미국의 아트테라피 권위자인 레베카 칠콧(Rebekah L. Chilcote)은 2004년 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스리랑카의 쓰나미 이재민 아동들을 대상으로 아트테라피를 진행했습니다. 5-13세의 아이들 100여명을 대상으로 4주간 진행된 이 실험에서, 칠콧은 아이들에게 마음속에 있는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고 토론하도록 했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이 캔버스에 담아낸 그림은 회색빛으로 가득 차있었고 자신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했으나, 4주간 반복된 치료를 통해 아이들은 점차 꿈과 희망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고 캔버스도 다채로운 색채로 변화했습니다. 이는 언어로 풀어내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그림을 통해 치유할 수 있음을 입증합니다. 이 실험으로 인해 아트테라피의 효능이 인정받아, 2011년 일본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에도 미술치료사들이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색과 형태로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며 심리적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영국의 엄마들은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미술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미술의 어떠한 점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도움을 줄까?
아트테라피의 효과 중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컬러테라피입니다. 각 색에 담겨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정서발달에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빨강은 열정, 사랑, 따뜻함을 상징합니다. 초록색은 성장, 균형, 희망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이들은 생각을 언어로 스스로 표현해내기 어렵고 마찬가지로 부모의 생각을 아이에게 언어로 전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색감을 직접 이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하여 소통하거나, 아이들이 색감을 보고 느끼도록 하여 정서의 발달을 돕는 것이 컬러테라피입니다.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초록색 그림]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노란색 그림]
실내환경의 색채가 인간의 행동과 심리 변화에 영향을 주고, 특히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진행한 실험에 기반을 둡니다. 미국의 어린이 연구소는 난폭한 성격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분홍색 방에 있으면 유순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한나 에스텔(Hannah Estelle)이 독일 뮌헨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노란색, 연두색, 주황색, 옅은 파란색을 가까이하는 아이들은 긍정적이고 IQ가 올라간 것에 반해 흰색, 갈색, 검정색 환경에 있는 아이들은 IQ가 떨어졌음이 관찰되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학생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된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 색채 표준’을 정해두고 있습니다. 외부 놀이시설에는 빨간색을 사용해 아이들에게 도전과 열정을 북돋아주거나, 교실의 출입구나 운동영역에는 주황색을 사용해 생기와 활력을 부여합니다.
미술을 통한 정서적 안정은 성인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이지만, 뇌 발달이 활발히 진행되는 6세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그림과 함께 공존하며 색감을 느끼고 그 그림을 따라 그리는 행위는 아이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고, 창의력을 발달시킵니다. 스스로에 대한 이해력은 자존감 형성에 도움을 주며, 창의력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응력을 강화시켜줍니다. 영국만큼 거장의 작품이나 어린이를 위한 미술 프로그램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시간을 쪼개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나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면 어떨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단발성의 이벤트로 미술을 접하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의 사례에서 밝혔듯이,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 색채를 부여하거나 그림을 걸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겨울을 코앞에 두고 깊어가는 가을과 더불어 회색도시가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요즘, 불안정한 사회로 든든하게 버텨주어야 할 어른들조차 심리적으로 많이 지치는 나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 ‘나의 집’에 들어왔을 때 한 폭의 그림으로 위안을 삼고, 아이들에게는 점점 더 척박해지는 세상에서 지혜롭게 미래를 일궈나갈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문헌] - CATHY A.MALCHIODI, <아동미술심리 이해>, 2010.09 - JUDITH ARON RUBIN, <아동미술치료 2판>, 2009.10 - 백중열, <아동미술치료>, 2008.6 - Rebekah L. Chilcote, <Art Therapy with Child Tsunami Survivors in Sri Lanka>, (자료보기 클릭) - 김시웅, <컬러를 바꾸면 아이가 달라진다!>, (자료보기 클릭) - 조선닷컴, <유아 미술 교육, 창의력 높히는 효과 탁월>, (자료보기 클릭)